메모리/이야기

어디서 왔니?

양태숙 2010. 8. 12. 00:53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러내렸다. 집안이 습기와 땀냄새로 퀴퀴한 느낌이었다.

그러하니 뭘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시간만 죽이고 있다가 운동으로 땀을 더 빼고자

해거름에 집을 나섰다. 마을과 약간 떨어진 우리집 근처에서는 매미소리가 잘 안들리는데

마을 쪽으로 내려가자 자지러지게 매미가 울어댔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너는 올해 자손을 번식하는 목표를 달성하고도 남겠다고 생각하며

그 매미가 우는 은행나무 밑을 지났다.

 

대낮이 아니어도 땅의 열기와 풀냄새가 훅훅 코로 끼쳐왔다.

곳곳에는 제초제를 뿌려 풀을 말려 죽여 누렇게된 땅들이 많았다.

그 풀냄새 속에는 제초제 냄새도 섞여 있었다.

내 작은 밭은 잡초가 점령한지 이미 오래 되어서 이젠 조바심도 안난다.

그야말로 아무런 약도 뿌려 본적도 없는데 그건 농사 지어 보겠다는 의욕이 없어서이다.

 

그림 때문에 시간 없다는 좋은 핑계가 있고 어쩌다 시간이 나도

다른 볼일로 외출이 잦다는 또 다른 핑계가 농사가 적성이 아니라는 결론을 맺게 한다.

참나! 나의 전원생활이 고작 요정도의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돌보지도 않는 밭에서 맹렬하게 자라는 것이 참외였다.

난 내 밭의 참외를 불가사의라고 여긴다.

작년에 이상한 줄기가 잡초더미 사이를 붙잡고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작은 덩굴손이 크게 자란 풀을 붙잡고 이리 저리 줄기를 뻗어 나갈땐 호박인줄 알았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 조그만꽃이 호박꽃은 아니어서 두고 보기로 했다.

또한 덩굴손이 붙잡을 데가 없으면 안되니 풀을 없애지 말아야겠다는

아주 적당한 핑계로 여유로울 수 있었다.

 

 

 

그것이 뭔지는 얼마 안가서 알게 되었다.

바닥에 아주 작은 둥근모양의 참외 비슷한 초록색 열매가 나타난 것이다.

얼마나 신기 했는지. 씨 뿌린적도 없는데 얘는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도 사다 먹은 참외 껍질과 씨를 밭에다 묻었을 것이고 거기서 발아를 한게 틀림없었다.

허나 거름도 보살핌도 없는 숭악한 밭에서 얼마나 열렸겠나.

서너개가 풀잎 사이에서 굴러다니는 걸 키워서 드디어 세 개를 땄다.

하나는 보통 크기의 노란색으로 파는 것과 흡사했고 또 하나는 좀 작고 한 귀퉁이가 찌부러진 형태,

나머지 하나는 더 작아서 볼품이 없었다. 그래서 애틋하고 미안했다. 못 키워 줘서...

 

냉장고에 넣지도 않고 감상하다가 이틀 후 드디어 제일 큰 놈을 과도로 삭둑삭둑 잘라서 시식을 했다.

엥~ 이게 뭔 맛이여? 겉은 달콤한 빛의 노란 참외색 이었으나 입 속에 씹히는 맛은

오이와 별반 다를바 없는 싱거운 맛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제대로 키우지도 않은 그 열매가 달 수가 없지.

그래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참외를 먹어 본 것이 어딘가.

그 맛이 더 순수한 참외이지 싶었다.

 

 

올해 또 참외가 난리법석이 났다. 물론 씨 뿌린적은 없다.

오늘 보니 땅바닥에 둥그런 것이 한 두개가 아니다.

물론 참외 근처의 풀 뽑기는 하지 못했다.

가녀린 덩굴손이 붙잡을 곳 없어서 허공을 헤멜까봐 마음이 안 놓여서.

어떤 줄기는 위로 올려 놓고 사진 찍어준다.

그나저나 올해의 참외는 어디서 왔지?

내가 참외를 사 먹은 것은  6월쯤인데 참외싹은 그 전에 이미 나 있었다.

땅에 묻혀 있던 작년의 씨가 계속 나오는 건가?

아무러면 어떠랴!

원래 없었던 이땅의 인간들도 이리 많이 생겨 났는데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