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사람

하재봉이 만난 사람 '노래하는 시인 장사익' (2006년 글)

양태숙 2008. 9. 4. 22:43

 

그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가슴속에 막혀 있던 무언가가 탁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선운사 동백꽃을 보기 위해 찾아갔더니 동백꽃은 지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 속에 남아 있더라는,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아 있더라는, 미당 선생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구처럼, 그의 노래에는 한국인의 원형적 정서가 담겨 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 혼자 서있는 허수아비와 그 위로 흘러가는 하얀 구름, 동구 밖에 머리 풀고 서있는 커다란 나무와 허리 구부리고 밭일하는 늙은 할머니, 이런 풍경들이 저절로 눈앞에 펼쳐진다. 내 피 속에 나도 모르게 들어와서 똬리 틀고 나가지 않는 한국적 정서의 핵심을, 그의 노래는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장사익. 그는 노래를 업으로 살아가는 가수지만 대중들에게 낯익은 이름, 낯익은 얼굴은 아니다. 그런데도 10년 전,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공연 열흘 전 예매처에 갔다가 이상한 경험을 했다. 이미 표가 매진되었다는 것이다. 공연 장소가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이었다. 무명가수의 공연이 열흘 전에 매진된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믿기지 않아서 거듭 거듭 확인을 했다.

그의 노래에 한번 빠져들면 열광적인 마니아로 변해간다. 장사익의 노래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과, 그의 노래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 세상은 이렇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결국 나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장사익의 공연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이대 후문 쪽에 있는 작은 재즈 바에 갔다가 장사익의 공연 일정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재즈 바에서 공연하는 것일까? 그곳에서 나는 장사익의 공연을 처음 보았다. 장사익의 노래를 라이브로 듣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장사익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그의 노래에는 즉흥성과 현장의 신명이 기막히게 살아 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개최하는 시 낭송과 음악의 밤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지금은 작고한 카지노계의 대부 전낙원 회장과 전 팬클럽 회장이며 동서문학 발행인이었던 전숙희 선생이 주최하는 행사였다. 나도 몇 년 동안 그 행사에서 사회를 보고 시 낭송을 했는데, 그때 장사익이 초청되었다.

행사가 끝나자 전낙원 회장은 호텔 꼭대기 층에 있는 스카이라운지로 우리를 데리고 올라갔다.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모두 내보낸 뒤 문을 걸어 버렸다. 장사익의 노래를 듣고 너무나 반했다는 것이다. 장사익은 그 다음 날 서울에서 일이 있기 때문에 올라가야 했지만, 전낙원 회장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자신의 차로 서울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까 노래 한 곡 더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나는 노래를 너무 못했다. 책읽기 하듯 노래했다. 빵점 수준이었다. 5학년 때부터 웅변을 했는데 시골 뒷산에서 매일 소리 질렀다. 웅변하려고 소리 질렀는데 결과적으로는 목을 가꾼 게 되었다. 아버님 장구 치는 소리가 너무 신났고, 서해안 노을을 마주 보고 부는 동네 아저씨의 태평소 소리가 너무 눈물겨웠다. 그런 것들이 어린 시절 내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마흔다섯에 가수 데뷔

장사익은 시골 장터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외모다. 1949년 충남 광천 출생인 그는 제대한 뒤 보험회사, 카센터 등을 전전하며 일했다. 그러다 ‘내가 이거 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닐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카센터를 그만두었다. 1980년 태평소로 국악에 입문한 후 1993년 전주대사습놀이 공주농악 장원, 전국민속경연대회 결성농요 대통령상, 1994년 전주대사습놀이 금산농악 장원을 받았고 KBS 국악대상 뜬쇠사물놀이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농악 뒤풀이의 라스트는 항상 나였다. 그걸 판막음이라고 한다. 더 이상 아무도 노래할 수 없게 최고의 소리꾼이 노래하면서 판을 끝내는 것이다. 그 판막음을 늘 내가 장식했다. 뒤풀이는 대부분 아수라장이다. 그 판에 따라 즉흥적으로 노래를 해야 한다. 판의 성격에 따라 내 스스로가 음악을 만들어 갔다. 국악의 멋과 태평소의 즉흥성과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노래들을 불러서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 뒤풀이에서 만난 절친한 후배, 피아니스트 임동창의 권유로 그는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임동창이 피아노를 치고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여 1994년 홍대 앞 ‘예’ 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100석 극장에 300~400명이 몰려들었다. 앉을 자리가 없으니까 관객들이 무대 위까지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장사익은 나중에 무대 벽에 등을 붙이고 관객들에게 포위된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노래를 불러야 했다.

“노래한 지 만 12년째지만 사람들이 내 노래를 왜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메트로놈에 맞춰 정확하게 부르는 그런 노래가 아니라, 찬바람 불면 가을이 깊어지나 보다, 아지랑이 피면 봄이 오나보다, 라고 생각하듯이 자연과 하나가 되어 진정성으로 부르는 내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다. 내 노래는 즐겁고 기쁜 것이 아니라 어둡고 슬프고 그렇다. 나는 요즘 젊은 가수들보다는 몇 살 더 먹었고 인생의 구석들을 좀 아니까, 그런 것을 찾아내서 얘기하듯 읊조린다.”

장사익의 창법은 그가 익숙한 국악에 닿아 있지만, 장사익을 장사익으로 만드는 것은 프리재즈 스타일이다. 프리 재즈의 자유롭고 즉흥적이며 내면의 넘치는 에너지가 가장 효과적으로 전통음악과 융합된 것이 장사익의 노래다. 그의 즉흥성에 영향을 준 사람 중 하나가 열 손가락에 북채를 쥐고 드럼을 쳤던 고 김대환이다.

나는 장사익을 만나기 위해 세검정 그의 집으로 갔다. 상명대학교로 올라가는 북한산 왼쪽 홍지문 위에 그의 집이 있었다. 산을 따라 서있는 이층집 그의 마당 뒤편에는 3층 높이의 거대한 흰 바위가 있고, 그 위로 서울 성곽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연히 이 집을 보고 부인을 졸라 빚을 내서 이사를 온 것이 6년 전이다.

그의 집 2층 거실에 앉으니 뒷마당의 큰 바위가 옆으로, 그리고 앞으로는 단풍 들어가는 인왕산과 눈이 마주쳤다. 바람이 불자 마당에 꽂아 놓은 솟대에 매달린 수많은 풍경들이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큰 울음은 아니지만 흐느끼듯, 절규하듯, 때로는 속삭이듯, 몸을 흔들어 댔다. 거실은 나무 탁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고 한쪽 구석에 기타 하나만 놓여 있었다.

“시는 노래다. 내 노래는 100%가 시다. 충남 금산에 좌도 시인 동호회가 있는데, 거기서 만난 안용산 시인이 자신의 시집 열 권을 줬다. 시를 읽는데 노래가 저절로 술술 흘러나왔다.”

장사익은 마흔다섯의 나이에 데뷔해서 마흔일곱에 첫 앨범 ‘하늘 가는 길’(1997년)을 냈다. 그리고 ‘기침’(1999년), ‘허허바다’(2000년), ‘꿈꾸는 세상’(2003년) 등의 앨범에 이어 올 12월, 5집 앨범 ‘사람이 그리워서’가 출시된다. 12월 10일에는 세종문화회관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5집 앨범 ‘사람이 그리워서’에는 모두 9곡이 수록된다. 검은 상처의 블루스, 봄날은 간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등 옛날 노래를 리메이크 한 3곡, 그리고 나머지는 서정주의 ‘황혼길’, 김강태의 ‘희망 한 단’, 서홍관의 ‘무덤’, 권대웅의 ‘자동차’ 등 시인들의 시를 노래한 곡들이다. ‘사람이 그리워서’라는 제목은 뉴욕에 거주하는 김형수 시인의 시 ‘시골장’에 나오는 ‘사람이 그리워서 시골장은 서더라’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노래 연습은 별로 안 한다. 옛날 유행가 책이 있는데 심심하면 그것을 뒤적거리며 노래 부르는 게 나의 학습이다. 옛날에는 열심히 발성 연습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좋은 시가 있으면 무릎을 탁 치고 기타로 쳐보고 음을 하나 잡아서 이리저리 굴리며 노래를 만든다.”

나는 그가 저잣거리에서 즉흥적으로 내지르는 소리를 더 좋아한다. 거친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의 노래는 그렇게 위로해 준다. 장사익의 가장 큰 무기는 그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상처 받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는 장식하지 않고 맨몸으로 노래한다.

“내 노래는 하찮은 것이지만 사람들은 내 노래 속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발견한다. 내 노래를 통해 사람들이 소통하는 것이 나는 좋다. 노래는 메시지다.”